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 1335~1408)는 조선 왕조의 창시자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국가 조선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뛰어난 무장으로 고려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정치 개혁을 통해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조선 제1대 왕 태조 이성계
생애: 1335~1408년
재위기간: 1392~1398년
휘: 이성계, 이 단
묘호: 태조
1. 태조 이성계의 생애와 성장
1) 출생과 가계
태조 이성계는 1335년(충숙왕 4년) 고려 함경도 영흥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이자춘은 원나라와 고려의 국경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한 유력한 지방 호족이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이성계는 어려서부터 군사적 역량을 쌓을 수 있었다.
2) 고려의 무장으로 활약
이성계는 젊은 시절부터 무장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특히 고려 말기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는 데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
- 홍건적 격퇴(1361년): 고려를 침략한 홍건적을 격퇴하여 수도 개경을 수호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 왜구 토벌(1380년, 황산대첩): 이성계는 황산(현 전북 남원)에서 왜구를 대파하며 명성을 얻었다.
이러한 전공으로 그는 고려 말기에 강력한 군사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2.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
1) 위화도 회군(1388년)
고려 우왕(禑王) 시기, 요동 정벌을 추진하던 최영(崔瑩)의 명령에 따라 이성계는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그러나 그는 “4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워 요동 정벌이 부당함을 주장하며 1388년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회군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는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2) 고려 왕조의 몰락과 새 왕조 수립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는 실권을 장악하고 친명(親明) 정책을 펼쳤으며, 급진 개혁파인 정도전, 조준 등의 도움을 받아 새 왕조를 준비했다.
- 1389년 공양왕을 옹립하여 명목상 고려를 유지했지만,
- 1392년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하며 태조로 즉위하였다.
3. 태조 이성계의 통치와 업적
1) 수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1394년)
태조는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을 대신하여 새로운 수도를 한양(현재의 서울)으로 정했다. 이는 국가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중요한 조치였다.
2)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확립
이성계는 불교 중심이었던 고려의 사상적 기틀을 바꾸어 성리학을 조선의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편찬하며 새로운 통치 체제를 마련하였다.
3) 과전법 시행(1391년)
조선 건국 이전부터 실시된 과전법(科田法)은 고려의 토지 제도를 개혁하여 신진사대부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농민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 중요한 제도였다. 이는 조선 왕조의 안정적인 경제 운영에 기여했다.
4. 태조의 말년과 왕위에서의 퇴위
1) 왕자의 난(1398년)
태조 이성계는 조선 건국 후 장남인 이방우보다 부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정도전과 신진 세력들은 후계 구도를 명확히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이에 반발한 태조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방석과 정도전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2) 태조의 퇴위(1398년)와 최후
이성계는 왕자의 난 이후 왕위에서 물러나 둘째 아들 정종(이방과)에게 왕위를 넘겼다. 이후 함경도 영흥으로 물러나 여생을 보내다 1408년 생을 마감하였다.
5. 가계도

6. 태조 이성계의 역사적 평가
1) 긍정적 평가
- 조선을 창건하여 500년 동안 지속될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
- 성리학을 국가의 근본 이념으로 채택하여 조선 사회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 과전법을 통해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고 신진 사대부 세력을 키웠다.
2) 부정적 평가
- 왕자의 난을 방치하여 왕권의 불안을 초래했다.
- 고려 왕조를 멸망시킨 점에서 일부 고려 유학자들에게 반역자로 비판받기도 했다.
- 즉위 이후 적극적인 통치보다는 정도전 등의 신진 사대부들에게 권력을 의존한 점이 있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혼란 속에서 뛰어난 무장으로 성장하여 조선을 창건한 개국 군주였다. 그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고 한양 천도와 과전법 시행 등을 통해 국가의 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그의 후계 구도 문제와 왕자의 난으로 인해 조선 초기 정치적 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조 이성계는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만든 인물로 평가되며, 그의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